Artist Statement
“LIVE STRONG” 시리즈

“우리가 스스로 방향성을 찾아갈 수 있도록
내면의 솔직함과 깊이를 더욱더 단단하게 만들어주는 것.”

예술가의 자아와 현대인의 자아 사이에 존재하는 저는, 매일같이 두 자아에 대한 충돌을 온몸으로 감내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상충하는 자아들이 충돌, 발생하는 내적 에너지를 직시합니다.

작품을 통해 동시대를 살아가는 멀티 페르소나의 예술가가 가진 다중적 자아들 간의 괴리감,
그리고 그로부터 파생되는 새로운 가능성에 대한 메시지를 던지고자 합니다.
2020: 백의 짐생 ​​​​​​​
독립기획자 최하얀
 남구에 위치한 작가의 작업실에 방문했다. 처음 방문해본 그의 공간은 나에게 도무지 정돈되지 못한 인상을 준다. 나무로 된 커다란 이젤 위에는 물감이 잔뜩 묻은 청색 작업복이 걸쳐져 있다. 바닥에는 수십 개의 물감통과 쓰다 남은 스프레이가 붓과 함께 얼룩덜룩 뒤섞여있다. 캔버스가 놓여있던 것이 분명해 보이는 흰 벽에는 다채로운 색상들이 네모난 공백만을 남겨둔 채 사방팔방으로 마구 흩뿌려져 있었다. 이 백색의 공백들은 서로 다른 시기 탄생했을 것이나, 그가 자신의 작업물을 켜켜이 쌓아 보관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물감의 흔적들을 수명처럼 덧입어가며 주변과 제법 어우러지게 되었다. 그의 휘두름을 차마 다 따라붙지 못한 색상들은 벽에 튀거나, 되레 뿌리쳐지거나, 스프레이 되거나, 화면 밖으로 줄줄줄 흘러내리면서 오늘날 이 같은 공간을 조성했을 것이다.

 그의 작품을 처음 마주한 것은 올해 한평갤러리에서 열린 <낙관적 개인>展 에서였다. 나는 검은 털을 머리서부터 뒤집어쓰고 관람객의 시선을 살짝 등진 작가의 모습을 보았다. 뒤이어 에이포지 정도 크기의 작은 화면 위를 죽죽 뻗어져나가는 선과 획, 포스터 칼라처럼 강렬한 색채와 함께 제시된 상징적이고 직접적인 문구를 보았다. 가히 야수적이다. 그와 일면식이 없던 나는 작품을 통해 자연스레 신경질적이고 날 선 젊은 작가의 모습을 상상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비평을 시작하기 전 그의 작품을 ‘경쾌한 자본주의’라 주제 지었다. 자본주의의 ‘폐해’만을 이야기한다 하기에 그의 작품은 경쾌하고 힘이 넘쳤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와의 인터뷰를 마치고 작가의 신작 <갈증>(2020)을 보게 된 이후 그의 작품 전반을 해석하는 관점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그렇다면 하도훈의 작품을 해석할 키를 다시 쥐어보자. 단순히 ‘야수적’이라고 표현하기엔 해당 예술개념이 차마 포괄하지 못할 신화적 분위기가 화면 안에 존재하고 있다. 캔버스를 난도질 하듯 강하게 질러진 선과 색을 배경으로 표현된 도상은 ‘자본주의 사회’로 감지된 주변 환경을 서술하고 있다 보기에는 다분히 긍정적으로 의지적이다. 결국 그의 작품에는 이 세계를 살아갈 ‘나’ 자신을 이야기하고 싶은 욕망이 서려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이와 같은 성찰에는 다음의 질문이 따라온다. : 시멘트 정글이 되어버린 세상에서, 나는 무엇이 되어 살아갈 것인가? 작가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 짐승의 탈을 썼다. 고릴라, 소, 뱀 등의 힘 센 짐승으로 치환된 화가는 거칠게 이를 드러내고 공격성을 표출한다. 원초적 공격성은 힘을 상징한다. 그리고 짐승의 힘은 위엄이 된다.

 작가는 물감을 손에 직접 묻혀 화면에 비비거나, 날카로운 도구로 긁어내고, 스프레이 하는 등의 원시적인 방법을 통해 대상을 표현한다. 이렇게 우연적이고 단발적인 표현들은 <예술과 주술 사이>(2018) 시리즈를 통해 이뤄내고 싶었던 바와 같이 관람객들을 일종의 원시적 주술 상태에 빠져들게 한다. 그가 관람객들을 설득시키기 위해 사용하는 ‘동물적이고 원시적인 위엄’은 토테미즘 신앙과 닮아있다. 토테미즘은 원시공동사회 종교의 한 형태로 혈연적, 지연적 집단이 동·식물이나 자연물과 공통의 기원을 갖거나 결합관계에 있다고 믿으며 그것을 집단의 상징으로 삼고 숭배하는 것이다. 작가는 원시적이고 주술적인 도상을 통해 우리 안에 내재한 공동의 감각을 일깨운다. 그리곤 모든 것이 시멘트로 변해버린 생태계에서, 우리는 무엇으로 살아야겠는가. 하고 묻는다.

 이와 같은 흐름에서 올해 10월 <갈증>(2020) 작업이 등장한 것은 주목해야할만한 지점이다. 그는 기존에 사용해온 자극적이고 현란한 색채들을 모두 내려놓고 ‘백색’의 염료에 변용을 주어 다양한 표현법을 시도했다. 하도훈 작가는 해당 작업이 자신에 대해 더 깊이 고민한 결과 등장한 작업이었다고 말한다. 이 지점에서 그의 작업실 전경을 다시 떠올려보자. 물감들이 휘몰아치고 남은 공백의 공간을 한 번 더 들여다보자. 색채가 사라진 백색의 회화가 등장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작업실 벽에 남은 백색의 공간은 그가 남긴 흔적들의 집약체이자 그의 진정한 물음이 담길 그릇처럼 보인다. 색은 배제되지 않았다. 마티에르를 위해 두껍게 쌓아올린 그의 물음들을 다 더한 자리에는 희게 덮인 캔버스가 남는다. 여기, 흰 옷을 멋스럽게 걸쳐 입은 날짐생 하나가 온 몸에 물감을 묻히고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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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국어 ‘짐승’은 불교용어 ‘중생(衆生)’에서 기원한 말로 <용비어천가>(1447, 30장)에 ‘즁싕’의 형태로 처음 나타났다. 민간에 의해 사용될 당시 생명체 전부를 가리키던 말이었으나 15세기부터 사람 이외의 동물을 의미했으며, 현대에는 주로 땅 위에 있는 동물을 가리킨다. 나는 불교적 관점에서 짐승의 삶이 결국 윤회를 거듭해 인간의 삶을 지향한다는 사실에 착안하여 작가의 주제를 표현하기 위해 인간과 짐승의 경계가 모호한 옛 국어 ‘짐생’의 표기를 선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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